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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문서로 드러난 명성황후 시해 사건의 전모 4편

최문형 교수 인터뷰 "왕후와 대원군 계속 갈등 빚은 것처럼 이해를 하는데 그건 사실
아니다. 68년 처음 갈등 시작 73년 10월달에 대원군 실각 당하니까 4,5년간만 대립.
대원군은 어떤 존재인가 결국 민황후가 청나라 거부 일본 거부하려는데 청나라와 일본에 의해 차례로
민황후를 견제하기 위한 견제용으로 이용 당했을 뿐이다"
러시아 보고서 중 뮤텔의 증언서에는 대원군이 일본에 의해 이용 당했음을 알게하는 단서가 있다.
1895년 10월 8일 새벽 2시.
일본군대는 대원군의 별장인 아소정에 침입한다.
대원군이 방에서 나오지 않자 강제로 끌어내 가마에 태운다.
그들의 목적지는 경복궁이었다.
일본은 강제로 대원군을 궁궐로 호위해 온 것이다.
명성황후 시해 현장에 대원군을 데려다 놓는 것이 그들의 목적이었다.

최문형 교수 인터뷰 "명성황후를 살해하고 그 책임을 대원군에게 전가시키기 위해서 대원군과
훈련대에다가 전가시키기 위해 끌고 갔죠.
직접살해는 낭인들이 하고 대원군과 훈련 대는 끌고가서 앉혀놓고 나중에 시해 책임을 전가하려고
했던 겁니다.
중국 상하이에서 발행되던 노스차이나 헤럴드지는 당시 명성황후 시해 사건의 진상을 비교적 정확하게
밝혔다.
이 신문은 대원군은 명성황후 시해사건과 무관함을 보도하고 있다.
대원군은 강제로 궁궐로 끌려가 죄수처럼 감금된 상태로 있었다는 것이다.

이민원 교수 인터뷰 "이 자료로 볼 때 대원군은 이 사건의 주모와 아무 관련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 일본측에 의해 강제로 경복궁에 끌려들어가 나중에 이 사건의 주범으로 누명을
뒤집어 쓰게 됩니다"
일본은 명성황후 시해 사건의 주모자로 대원군을 이용하려고 했던 것이다.

명성황후 시해 사건 당일,고종도 총과 칼로 무장한 일본 무리들에게 습격을 당합니다.
왕비를 찾아 왕의 침전에 쳐들어 온 일본 무리들은 고종과 세자에게 심한 폭행을 가합니다.
고종은 옷이 찢겨지고 세자는 칼등에 맞아 의식을 잃습니다.
이 상황에서 고종은 중요한 목격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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