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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왕의 한글 창제 이야기, 한글날의 유래

한글은 세종대왕이 창제, 아니면 학자들과 공동으로?

세계 여러 나라의 대부분의 글자들은 태어난 날이 언제인지, 어떻게 발전해 왔는지 잘 알 수가 없다. 하지만 한글은 만든 사람들과 태어난 날짜, 그리고 해설서까지 있다. 더 나아가 창제 동기가 분명히 밝혀져 있는 글자는 세계적으로 한글이 유일하다. 그래서 세계의 많은 학자들이 한글에 대해서 모두들 감탄하고 부러워한다.

한글은 세종대왕이 창제했을까? 아니면 공동으로 만들었을까? 세종대왕이 집현전 학자들의 도움을 받아 창조했다는 공동 창제설이 우리 사회에 널리 퍼져있다. 그것은 세계적으로 인정받을 만큼 뛰어난 문자를 왕이 혼자 만들었을 리 없다는 의심에서 출발한다.

상식적으로 판단할 때, 한 나라의 왕이 손수 새로운 문자를 만들었다는 것은 쉽게 믿기지 않는다. 그렇게 놀라운 문자 창제를 어떻게 혼자서 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런데, 한글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임금이 단독으로 추진할 수밖에 없는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하고 세종대왕 고유의 작품이라고 믿고 있다. 강력한 창제 의지와 그것을 떠받들 수 있는 뛰어난 지식과 아이디어가 함께해야 가능한 일이었다. 세종이 직접 한글을 창조했다는 것은 객관적인 역사적 사실로 입증된다.

첫째, 세종이 직접 만들었다는 강력한 근거는 실록에서 찾을 수 있다. 1443년 12월 30일자 《세종실록》에 “이 달에 상감마마께서 친히 언문(諺文) 스물여덟 글자를 만드셨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세종대왕이 친히 만들었다고 밝히고 있다.

조선왕조실록은 사실을 기록하기로 유명하고, 또한 당시 논쟁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중국이 문제를 제기하면 직접 관련되는 사람이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에 훈민정음을 사실에 어긋나게 기록할 수 없었을 것이다.

둘째, 최만리 등 집현전 학사들이 창제 반대 상소를 올린 것을 보면 새 문자 창제는 공식적인 기관인 집현전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세종이 비밀리에 창제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비밀리에 이루어졌다는 것은 훈민정음이 공표된 뒤에 집현전 학사 최만리 등이 상소를 통해 “신하들과 의논도 하지 않았다.”고 비판한 데서도 증명된다. 또한, 상소문에서 “백성을 다스리는 데 하나도 이롭지 않은데 왜 굳이 힘을 들이고 애써 연구하십니까?”라는 내용이 있는데, 세종이 ‘연구’했음을 알 수 있다.

만약 집현전 관원들이 공개적로 조력자로 일했다면, 최만리 등이 모르고 있을 리가 없을 것이고, 훈민정음이 창제되기도 전에 이미 반대운동이 거세게 일어났을 것이다. 최만리는 집현전의 실질적인 수장이었고 그 재직 기간도 길어 집현전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훤히 아는 인물이었다.

세종은 우리말과 중국말의 음운체계의 차이를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자음, 모음, 성조 등의 요소를 이해하고 있었다. 사실 지금 이 시점에서 전 세계의 문자 관련 전문가를 모아 놓고 연구한다 해도 한글과 같은 문자를 만들지 못할 것이다. 그렇게 보는 이유는 이렇다. 한글 자체가 완벽에 가까운 문자이다.

한글 창제자 세종은 지금의 시각으로 보아도 최고의 학자였다. 학문 차원에서 보더라도 언어학(성음학)뿐만 아니라 음악학, 천문학 등 새로운 문자 설계에 필요한 학문 분야에 정통한 인문학자이자 과학자였고 디자인과 음악에 정통한 예술가였다.

한글과 같은 문자는 융합적인 능력을 갖춘 사람이 오랜 연구 끝에 발명할 수 있는 것이지 여러 사람이 모여 지혜를 모은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한글은 언어학뿐만 아니라 철학, 음악, 수학 등 다양한 관련 학문에 정통한 천재가 지속적이고 오랜 노력 끝에 만들 수 있는 문자이지 오히려 공동 연구로는 창제하기 어려운 문자다.

훈민정음 해설서인 《훈민정음》 해례본을 함께 펴낸 사람들이 집현전 학사들이다. 바로 이 해설서 때문에 훈민정음을 세종과 집현전 학사들이 함께 창제했다고 보는 것인데, 이것은 올바른 판단이 아니다. 집현전 학자들은 훈민정음 창제 후에 세종의 가르침과 지시에 따라 《훈민정음》 해례본 집필에 참여했고, 새 문자를 실험하고 널리 보급하기 위한 후속 작업을 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한글날은 어떻게 정했나?

1926년 11월 4일 조선어연구회(한글학회 전신)가 주축이 되어 매년 음력 9월 29일을 ‘가갸날’로 정하여 행사를 거행하다가, 1928년 명칭을 ‘한글날’로 바꾸었다. 1931년에 음력 9월 29일을 율리우스력으로 환산해서 10월 29일로 정했다가, 1934년에 다시 그레고리력으로 환산해서 10월 28일로 변경하였다.

1940년에 경북 안동에서 《훈민정음》 해례본이 발견되어 훈민정음 반포일이 음력 9월 상한임이 확인되었다. 상한은 1일부터 10일 사이를 가리키므로 반포한 날은 결국 음력 9월 1일부터 10일 사이이다. 광복 후에 한글학회는 음력 9월 상한의 마지막 날인 9월 10일을 양력으로 환산하여 10월 9일을 한글날로 정했다. 한글 반포 500돌인 1946년 10월 9일에 덕수궁에서 기념식을 거행했고 그 후 매년 이 날을 한글날로 기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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