Загрузка...

러시아 문서로 드러난 명성황후 시해 사건의 전모 3편

강창일 교수 "당시 진압이라는 치안 유지라는 명목으로 동원이 돼가지고 가담
이사람들 총 쏠때.명성황후 시해 사건 모르고 있었다..만일 사태 대비...일본에 가담한다
이정도의 역할이 부여 됐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일본이 훈련대에게 책임을 전가할 목적이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명성황후 시해 현장에 훈련대가 동원되었던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새벽 5시 궁궐습격의 신호탄인 총성이 광화문에서 울리고 경복궁은 삽시간에 일본군에
의해 점령 당합니다.
그리고 새벽 6시를 전후한 시각.
명성황후는 옥호루에서 시해되는데요 바로 그 시각.이곳 강녕전에는 의외의 인물이
나타납니다.
바로 대원군입니다.
대원군이라면 여러분도 잘 아시다시피 명성황후와는정치적 라이벌 관계였는데요.
그렇다면 대원군은 명성황후 시해 사건과 어떤 연관이 있었을까요. 명성황후가 시해 당하는
바로 시각. 대원군은 왜 궁궐에 온 걸까요

대원군은 왜 그곳에 있었나(대원군과 훈련대 주모 위장용)

대원군의 별장이었던 아소정자리에는 지금은 동도 중 공업고등학교가 대신하고 있다.
건물의 흔적은 사라지고 지금은 당시 우물가에 놓였던 디딤돌만 운동장에 쓸쓸히 남아 있다.

교장 인터뷰 "여기가 아소정터인데 대원군이 운현궁에서 나오신 이후에 돌아
가실 때까지 여기서 기거하다 돌아 가셨어 건물은 아흔아홉칸짜리 묘소가 있어서 국태공원
이라고 불리었던 적이 있다"

대원군은 자신의 일생이 너무나 덧없음을 뒤돌아보고 스스로 조소한다는 뜻에 거처하는 집을
아소정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당시 대원군의 처지가 어떠하였는지 말해 주고 있다.
명성황후가 시해되던 당시 대원군은 사실상 이 아소정에서 외부와 차단된채 은둔 생활을 하며
말년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명성황후 시해사건이 터지자 세상은 다시 대원군을 주목한다.
당시 프랑스 신문 일러스트라시옹에서는 명성황후 시해 주범으로 대원군을 지목 하고 있다.
정치적 대립관계인 대원군이 명성황후를 제거했다는 것이다.
당시 그들은 정치적 갈등 관계였을까.

Видео 러시아 문서로 드러난 명성황후 시해 사건의 전모 3편 канала 무엇이든 알려주마
Страницу в закладки Мои закладки
Все заметки Новая заметка Страницу в заметк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