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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사카 성 전투(1614) - 겨울의 진(大坂冬の陣)

1614년(게이초 19년)에 이전 게이초 14년부터 도요토미 가문이 재건하던 교토의 호코지(方廣寺) 대불전이 완성되고, 4월에 범종이 완성되었다. 공사감독인 가타키리 가쓰모토(片桐且元)는 범종의 명문(銘文)을 난센지(南禅寺)의 분에이 세이칸(文英清韓)에게 의뢰했다. 가쓰모토는 슨푸(駿府)의 이에야스에게 명문의 선정과 대불개안공양(大佛開眼供養)의 도사(導師)와 일시를 보고하는등 순차적으로 일의 진척을 알렸으나, 7월 이에야스는 가신인 혼다 마사즈미(本多正純)를 통해서 범종명문의 글중에 불길한 말이 있다고 해서 대불공양을 연기하게 했다.

이에야스는 고잔(五山)의 승려와 하야시 라잔(林羅山)에게 종명문을 해독시키게 한 후, 글 속에 '국가안강(國家安康) 군신풍락(君臣豊樂)'이란 구절을 보고 '국가안강'은 이에야스의 이름(家康)을 安자로 잘라버린 것이고, '군신풍락'은 臣과 豊을 이어놓아, 도요토미 가문의 번영을 기원하고 도쿠가와 가문에 대해 저주를 거는 것이라고 단정지었다. 이것은 도요토미 가문을 공격하기 위한 구실에 불과한 것으로 여겨진다. 또한 이에야스의 직함과 이름일 뿐인 '우복사원조신가강(右僕射源朝臣家康)'을 '이에야스를 쏜다'고 해석한 것으로 전해진다.

도요토미측은 8월 가쓰모토를 슨푸에 파견하여 이 사건에 대해 변명했으나, 가쓰모토는 이에야스와 만나지 못했다. 곧이어 오노 하루나가(大野治長)의 어머니 오쿠라쿄노 쓰보네(大蔵卿局)를 슨푸로 내려보내자, 이에야스는 오쿠라쿄노 쓰보메를 정중하게 맞이하였다. 이에야스는 명문사건을 어찌할 것인지 생각한 끝에 양쪽의 문제가 도요토미측이 도쿠가와 가문에 대해 불신감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고, 가신에게 명하여 오쿠라쿄노 쯔보메와 가쓰모토를 한자리에 불러 양쪽이 화해한다는 모습을 보여줄것을 요구하였다.

가쓰모토는 9월 오사카로 돌아와 개인적인 제안으로 히데요리의 오사카 성 퇴거등의 절충안을 진언했으나, 대답을 들은 도요토미 가문에서는 오사카 성은 히데요시 때부터의 거성으로 이 요구는 사실상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선전포고라고 받아들여, 가쓰모토와 동생 가타키리 사다타카(片桐貞隆), 오다 나가마스(織田長益) 등의 화친파를 추방하고 결전준비에 착수했다. 이 사건 전후로 히데요리의 측근이었던 이시카와 사다마사(石川貞政)등도 퇴거했다. 이에 대해 이에야스도 여러 다이묘들에게 오사카성 공격을 선언했다.

전투는 기쓰가와구치의 요새(11월 19일)에서 시작되었다. 여러개의 요새가 함락된 후 남겨진 요새는 버려지고 오사카 성으로 철수했다. 그사이 11월 26일에는 시기노(鴫野)-今福에서, 11월 29일에는 博労淵, 노다(野田), 후쿠시마(福島)에서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다.

도요토미측이 철수한 오사카성을 도쿠가와측은 약 20만명의 대군으로 완전히 포위하고 이에야스도 12월 2일 자우스 산(茶臼山)에 도착한뒤 각 부대는 참호와 축산(築山)[8]을 방패로 성에 접근했다. 이 포위전에서 일어난 최대의 전투는 사나다마루(真田丸)로 성 남쪽에서의 공방전(사나다마루 전투, 12월 3일 ~ 12월 4일)에서는 막부군을 격퇴하고 엄청난 피해를 입혔다.

도요토미측의 매점매석으로 인한 병량부족과 혹독한 겨울을 진지에서 보낸 도쿠가와측은 재빨리 도요토미측과 화친교섭을 진행하였고, 또한 도요토미측도 같은 이유로 병량과 탄약이 부족하고 도쿠가와측의 심리전에 말려서 진행하게 되었다. 말하자면 12월 상순에 있었던 대포에 의한 포격[9]으로 덴슈(天守)[10]등에 피해를 입힌 결과였다.

장병은 지쳤고, 또 도요토미 가문의 주도권을 쥐고 있던 요도도노도 덴슈에 대한 포격에 놀라 화친에 응하겠다고 해서 교섭은 18일날 도쿠가와측의 교고쿠 다다타카(京極忠高, 교고쿠 다카쓰구의 장남)의 진지에서 이에야스의 측근 혼다 마사즈미, 우코인(阿茶局)과 도요토미측의 사자로 파견된 요도도노의 누이동생 죠코인(常高院)사이에서 진행되어 혼마루를 제외한 니노마루, 산노마루를 파괴하는 것과 바깥 굴을 메운다는 것, 오노 하루나가와 오다 나가마스의 처분등을 조건으로 19일 화친이 성립되었다.

화친 조건인 모든 굴(堀) 혹은 해자의 매립에 있어 이것은 바깥 해자 만을 가리킨 것이라고 말하는 도요토미측과 모든 해자를 의미한다고 말하는 도쿠가와측간의 해석의 차이라고 생각된다. 이 해석을 두고 서로 논쟁을 벌이는 사이에 도쿠가와측은 독단으로 공사를 시작해 바깥해자뿐만 아니라 안쪽해자도 모두 매립하고, 성벽까지 파괴하는 공사를 진행했다.

자막: http://gallog.dcinside.com/masakastev

Видео 오사카 성 전투(1614) - 겨울의 진(大坂冬の陣) канала 젠델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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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июня 2016 г. 8:54:49
00:3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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