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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제25장 주해.

예수 그리스도 제25장 주해.

1. 초막절.
이것은 일년 중 세 번째 맞는 대절기의 하나로서, 이 절기를 지키는 것은 이스라엘 민족의 국가적 행사이었다. 다른 두 절기는 유월절과 오순절이었다. 이 세 절기에는 이스라엘의 모든 남자가 주 앞에 나와 명절의 공식적인 의식에 참여하여야 했다. (출애굽기 23장 17절)

초막절은 “수장절”이라고도 했다. (출애굽기 23장 16절)
이것은 기념절이며 추수 의식이기도 했다. 애굽으로부터 구출되어 나온 이스라엘 민족이 오랜 황야의 여행을 하는 동안 천막과 임시로 지은 오두막에서 살면서 지내던 날을 기념하기 위하여, 이스라엘 사람들은 매년 일주일간의 절기를 지키고 하루의 성회를 가졌다. 일주일 동안 백성들은 “아름다운 나무가지”를 시내 버들로 엮어 만든 초막 혹은 장막에서 지냈다. (레위기 23장 34 에서 43절; 민수기 29장 12 에서 38절; 신명기 16장 13 에서 15절; 31장 10 에서 13절)

이 절기는 히브리 달력으로 일곱 번째 달, 즉 지금의 8월과 10월 사이의 기간에 해당하는 티즈리 달의 15일부터 22일까지 계속되었다. 이것은 죄로 인해 회개와 스스로 괴로움을 주는 날인 속죄일 다음에 오는 절기이었다. (레위기 23장 26 에서 32절)

초막절에 제단에 드리는 희생물은 다른 절기의 경우보다 풍성했다. 매일 수양 둘과 어린 양 열 넷과 수염소 하나를 속죄제로 드리고 숫 송아지를 드리는데 첫날에는 열세 마리, 둘째 날에는 열두 마리, 이와 같이 하여 일곱째 날에는 일곱 마리를 드려 도합 70마리를 드렸다. (민수기 29장 12 에서 38절)

이 70이라는 숫자와 매일 한 마리 씩 감하는 것은 율법의 규정에 의한 것이 아니고 랍비의 교의에 따른 것으로써 많은 상징적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그리스도의 시대에 와서는 전통에 의하여 규정된 의식이 많이 미화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아름다운 나무가지" (레위기 23장 40절) 는 레몬 비슷한 과일인 “실과”로 이해되었다. 그리고 모든 정통파의 유대인들은 아침 번제를 위해 성전에 갈 때, 그리고 그 날의 즐거운 행사에 참여할 때는 한 손에 이 레몬 비슷한 과일을 들고, 다른 손에는 “룰랍”이라고 알려진 작은 나뭇가지 한 다발, 혹은 잎이 무성한 나뭇가지를 들었다.

실로암 못에서 제단까지 물을 나르는 의식은 가장 큰 행사였다. 이 물을 제단에 가져와 술을 타서 번제물에 부었다. 명절의 마지막 날 혹은 큰 날에는 이 물을 가져 오는 의식이 생략 되었다고 한다. 예수께서 여덟째 날에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고 외치신 것은 이 생략된 의식을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이라고 한다.
명절의 밤에는 성전의 뜰에 커다란 등불을 켜 놓았었다.

예수께서 “나는 세상의 빛이라"고 하신 말씀은 이 등불을 자신에 비유하신 것이다.
초막절에 관해 더욱 상세히 알려면 신빙성 있는 종합 성경 사전과 조세퍼스의 유대인 고대사, 8권, 4장 1절; 15권, 3장 3절을 참조한다. 아래의 글은 에더스하임 “메시야 예수의 생애와 시대" 제2권, 158 에서 160페이지에 발췌한 것이다.

“성전에서 나온 사람의 행렬이 실로암 못에 이르면 제사장은 금으로 된 그의 병에 물을 가득 채운다. 그리고 다시 성전으로 돌아간다. 그들이 성전에 도착할 때는 아침 번제 의식의 마지막으로 큰 제단에 번제물을 올려 놓을 때쯤 된다. 물병을 가진 제사장이 물의 대문 (이 이름은 이 의식으로 인해 생겼다) 으로 들어오면 제사장이 삼중 나팔을 불어 환영하고 그는 곧장 제사들의 뜰로 들어간다.

물을 부은 후에는 곧 시편 113편으로부터 118편까지를 포함한 대 ‘할렐’을 피리의 반주에 맞춰 교송 혹은 서로 화합하며 부른다. 이방 국가의 수장절과는 달리 이 절기의 상징성을 보다 높이기 위해 제사장들이 제단을 둥글게 둘러싸는 의식으로 모든 의식이 끝난다. 그러나 ‘절기의 마지막 큰 날’에는 그들의 선조가 약속의 땅으로 갈 때 그들의 길을 막았던 여리고를 다시 둘러 싸기라도 하듯이 제사장들이 기도하며 제단을 일곱 번 둘러싼다.

2. 주님의 교훈의 분별.
누구라도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주님의 교훈이 하나님께로서 왔는지의 여부를 알 수 있다. (요한복음 7장 17절)

이것은 다른 사람의 말에 의존하는 것보다 확실히 신빙성 있는 방법이다. 저자는 매우 회의적인 대학생을 만난 적이 있었다. 그는 어떤 화학적인 분석의 공인된 결과를 믿을 수 없다고 말하였다. 왜냐하면 그 실험에 사용된 물질의 양이 극소량이었기 때문에 그는 그것이 전체를 결정할 수 있다고는 믿지 못하겠다는 것이었다. 그 학생은 화학에 있어서 초보자였다. 자신의 빈약한 지식으로 과학의 가능성을 판단하고자 한 것이다. 그래서 저자는 그에게 교수의 말대로 실행하면 언젠가 그 결과의 옳고 그름을 스스로 알게 될 것이라고 말해 주었다. 상급반이 되었을 때 그는 전에 의심을 가졌던 바로 그 물질을 분석하는 실험을 하게 되었다. 그는 충실히 노력하여 얻은 솜씨를 발휘하여 그 분석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전에는 그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비슷한 결과를 얻었다. 그는 남자 답게 전의 의심은 아무 근거가 없었음을 인정하고 스스로 진리를 알아낸 것을 기뻐했다.

3. 실로암 못.
‘실로아’ (느헤미야 3장 15절의 ‘셀라’) 와 ‘실로암’은 엘와드의 입구에 있는 못의 현대 아라비아 이름인 '아인 실완’의 ‘실완’을 히브리어와 헬라어로 각각 표시한 것이다. 고대의 참고 자료가 일치되어 이 사실을 입증한다. (느헤미야 3장 15절; 조세퍼스, 유대인 전쟁사, 5권, 4장 1절, 2절; 6장 1절; 9장 4절; 12장 2절; 2권, 16장 2절; 4권, 7장 2절; 8장 5절 참조)

현대의 명칭은 '에인' (샘) 이지만, 실로암은 샘이 아니라 기혼 혹은 처녀샘으로부터 바위로 통해 통로를 만들어 물을 대고 있다. 엘 비 패튼, 표준 성경 사전, “예루살렘"

4. 메시야는 어디에서 나시게 되어 있는가?
메시야는 베들레헴에서 나신다고 예언되어 있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메시야라고 믿고 싶어도 갈릴리에서 나오셨으므로 믿음을 억누를 수밖에 없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메시야가 나실 곳은 아무도 모른다고 배웠는데, 예수는 갈릴리에서 나신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믿을 수 없었다. 이에 관하여는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다.

다윗의 도시 즉 유대의 베들레헴이 메시야의 탄생 장소로 예언된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랍비들은 어린 예수가 태어나신 후 곧 다른 곳에 가셨다가 어른이 되신 후에 돌아오시는데 어디서 혹은 어떻게 돌아오시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고 잘못 가르치고 있었다. 라이트푸트를 인용하여 기키 ( 1권, 274페이지) 는 당시의 일반적인 비판에 관해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어떤 자는 랍비들이 메시야가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신 후 곧 대소동 가운데 영에 이끌려 다른 곳에 가셨다가 후에 다시 오시는데 어디로부터 오시는지 아무도 모른다고 가르치지 아니하셨느냐? 그런데 이 사람은 나사렛으로부터 온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5. 간음죄로 끌려 온 여인에 관한 기록.
어떤 현대의 비평가는 요한복음 7장 53절과 8장 1~11절은 흠정역 성서에 있는 대로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이곳에 기록된 이야기는 요한복음의 고대 원고 사본에는 없으며 그 문체도 독특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어떤 사본에는 이 이야기가 마지막 부분에 나온다. 또 다른 사본에는 영역 성경과 같은 이야기가 포함되어 있다.

캐논 패러는 다음과 같은 적절한 의문을 제기했다. (404페이지 주) 즉 이 이야기가 요한이 기록한 것이 아니며 잘못 삽입된 것이라면 왜 수많은 중요한 사본들이 이 이야기를 포함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6. 연보궤, 여인들의 뜰.
성전의 안뜰의 일부는 이스라엘의 남녀 모두에게 공개되어 있었는데, 이곳을 구별하여 여인들의 뜰이라 하였다. 이곳은 열주로 둘러싸여 있었으며 공적인 예배의 한 과정 으로서의 총회를 갖던 곳이다. 이 뜰의 네 모퉁이에는 의식을 위해 사용하던 방이 있었다. 그리고 이들과 대문에 있는 집들 사이에는 다른 건물들이 있었는데, 그 안에 연보를 받는 데 쓰는 나팔 모양의 연보궤가 있었다. (마가복음 12장 41 에서 44절 참조) 주님의 집, 40 에서 41페이지

7. 양의 우리.
요한복음 10장 2절에 관한 두메로우의 주해서는 다음과 같다. “이 비유를 이해하기 위하여 동양의 양의 우리는 매우 넓게 울타리로만 둘러싸여 있으며, 밤이 오면 그 안으로 양 떼를 몰아 넣는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문은 하나 뿐이며 지키는 목동도 한 사람만 남고 모두 집에 가서 쉰다. 아침이 오면 목동들이 돌아와 문지기와 인사하고 양 떼를 몰고 목초지로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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