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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나에겐 스승이 없는가.

어떤 분이 찾아와 이런 말을 합니다. 세상에 도무지 존경할 만한 스님이 없다고 말입니다. 가벼운 웃음이 나왔습니다. 왜 그분 눈에는 못난 스님들만 눈에 띄었을까요. 존경할 만하고 무언가 배울 게 있는 스님이 어딘가 분명히 있을 텐데 말입니다. 그분에게 왜 ‘내 주위에는 그런 스님이 없는 것’인지, 스스로에게 물어본 적이 있느냐고 묻고 싶었습니다. 아마도 없을 것입니다. 꼭 스님만이 아닙니다. ‘나에겐 존경할 만한 스승이 없다’는 건, 주변에서 익숙하게 듣는 말이기도 합니다.

스승이 없다고 여기는 이들은 대개 그 어떤 스승에게도 가르침을 받으려는 노력을 해본 적도 없습니다. 스승을 찾아보려는 노력 자체를 해본 적이 없는 것입니다. 가르침은 내가 일방적으로 기다린다고 해서 찾아오는 게 아닙니다. 자신 스스로도 가르침을 얻으려고 백방으로 노력해야 합니다. 선재동자는 수많은 선지식을 찾아뵙기 위해 갖은 정성을 다하고 열의를 보였습니다. 그러한 남다른 구도열로 선재동자는 마침내 깨달음을 이룰 수 있었던 것입니다. 스스로 구하지 않는데 스승이 어떻게 올까요. 선재동자는 스님이나 외도들, 왕 뿐만 아니라 장사꾼이나, 뱃사공, 심지어는 몸을 파는 여인도 찾아가 가르침을 들었습니다. 모두 53명, 가르침은 각각이었습니다. 스스로 열린 마음, 법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존경할 만한 스님이 없다고 여기는 그분은 특별히 그 어떤 분을 찾아뵙거나 법문을 듣는 그 어떤 노력을 하지도 않은 채, 신문 사회면이나 종교 이슈만 언급했습니다. 어떤 스님이 음주운전을 하고, 어떤 스님이 사기를 쳤고, 어떤 스님이 간통을 했다 등의 뉴스 말입니다. 문득 윤대녕 작가의 어느 소설에 나온 한 구절이 떠올랐습니다.

‘사람의 마음이란 이미 제 볼 것 다 정해놓고, 그렇게 봅니다.’

법에 대한 믿음이 있으되, 스승 복이 없다고 여겨진다면 내가 그 복을 쌓으면 됩니다. 존경할 만한 스님을 주위에 수소문하면 이런저런 조언이나 추천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 다음엔 그 스님 사는 절에 찾아가 차 한 잔 마시고 싶다고 청하면 됩니다. 그럼 됩니다. 무척이나 간단합니다. 스님은 사람 만나는 게 일인 만큼 웬만하면 만날 수 있습니다. 그래도 사람 사이의 만남인지라, 빈손보다는 간단한 간식거리라도 사가면 좋습니다. 작으나마 그러한 것들도 정성이 됩니다.

이미 스님인 저도 선지식 복을 쌓기 위해 노력합니다. 다른 절에 가면 항상 법당 불전에 공양을 올리고, 스님들 간식거리를 사가기도 합니다. 스님이라고 점잖게 공양을 받기만 할 생각은 없습니다. 저 또한 공부하고 수행하는 사람이기에, 이 수행의 인연이 잘 이뤄지도록 유루有漏의 복을 발원하기도 하고 스스로 복을 짓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 자기 스스로 수행을 통해서 마음을 비울 준비를 해나가야 합니다. 비우지 않고서는 본래 자연스럽게 있는 마음이 열리지 않습니다. 마음이 열리지 않으면 스승도, 선지식도, 부처도 찾아 나서려 하지 않습니다.

마음이 열리면 새로운 안목이 드러나게 됩니다. 안목이 드러나는 방식이란, 그렇게 못나 보이던 사람들이 결코 못나지 않은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이고, 암울하고 비관적으로 보였던 세상이 바뀐 바 없는 그대로 맑고도 깨끗한 모습으로 새롭게 다가서는 일입니다. 내 안목이 바뀌면 사람도 바뀌고 세상도 바뀌게 됩니다. 그러한 동시에 못난 모습만을 보아 왔던 내 자신이 얼마나 큰 자만에 빠져 있었는지 그제야 알게 되는 것입니다.

갇혀 살 때는 모릅니다. 벗어날 때에야 비로소, 그간 갇혀 살았다는 사실을 자각할 뿐입니다. 불교는 우리가 명백히 고정된 실체로서의 세상을 사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려 줍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세상은 없습니다. 심리학자 아들러는 말합니다. “사람은 객관적으로 같은 세계에서 사는 게 아니라, 각각의 자신이 ‘의미 부여’한 다른 세계에서 살아가고 있다.” 맞는 말입니다. 세상에 수많은 사람의 수만큼, 수많은 세상이 있고, 그 세상만큼 다른 우주가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과 사람의 만남이란, 개인과 개인의 사소한 만남이 아니라 서로 다른 세상과 우주의 거대한 조우인 셈입니다.

사람은 자신이 보고 느끼는 딱 그만큼만, 사람을 판단하고 세상을 평가합니다. 이는 명백한 진리입니다. 만일 내가 보는 사람과 세상이 형편없이 느껴진다면, 사실 그건 내가 그런 형편없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정말 제대로 사람을 보고, 세상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싶으신가요.

그럼 비우십시오. 비운만큼 사람과 세상은 새롭게 열립니다.

#원제스님 #질문이멈춰지면스스로답이된다

Видео 왜 나에겐 스승이 없는가. канала 원제스님의 스토리텔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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