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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제24장 주해.

예수 그리스도 제24장 주해.

1. 남을 위한 신앙.
고통 받는 그의 아들을 대신하여, 고민하는 아버지의 간구 즉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 주옵소서” (마가복음 9장 22절) 에서 그가 아들의 경우를 자신의 경우처럼 생각한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는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귀신 들린 딸이 있었으므로, 예수께 자기를 불쌍히 여겨 달라고 애원했던 일을 (마태복음 15장 22절, 본서 359 페이지) 기억한다. 이러한 경우, 신앙은 타인에 의해 고통을 당하고 있는 자를 위해 행사되었던 것이다. 이와 동일한 경우를 그의 하인의 병을 위하여 간구한 백부장의 예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의 신앙은 특별히 예수님의 칭찬을 받았다. (마태복음 8장 5 에서 10절; 본서 253 페이지)

또한 딸이 죽게 된 야이로의 경우 (누가복음 8장 41절, 42절, 49절, 50장, 본서 316페이지) 와 그들이 병든 친척과 친구를 예수께 데리고 갔던 많은 예에서 이러한 신앙을 찾아볼 수 있다. 앞에서 본 바와 같이 병 고침을 받을 수 있는 신앙은 병 고치는 신앙 (본서 321 페이지) 과 마찬가지로 참으로 하나님의 은사인 것이다. 인용된 실례들이 증명하듯이, 신앙이란 남을 위해서 행사될 때, 더 큰 힘을 발휘하게 된다.

병자를 위한 기름 축복과 관련해서 회복된 예수 그리스도 교회에서 세워진 권능 있는 의식인 이 의식을 행할 때, 장로들은 모든 참석한 자의 신앙을 격려해야 한다.
그 까닭은 이 의식이 병자를 대신해서 행하여지기 때문이다. 유아와 의식이 없는 자의 경우에는, 그들이 신앙을 나타내는 것은 분명히 기대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므로 친족과 친구의 신앙의 뒷받침이 더욱 필요하다.

2. 기도와 금식에 의하여 나타난 능력.
사도들이 물리칠 수 없었던 악한 귀신에 관해서 구세주께서 “기도와 금식이 아니면 이런 유가 나가지 아니하느니라”고 하신 말씀은 악마의 악과 악한 세력의 단계적 변화를 지적하신 것이며, 또 신앙에 있어서도 여러가지 단계가 있어서 그 결과가 다양함을 가르쳐 주신 것이다.

여기서 언급한 이 경우에서 사도들이 귀신을 쫓아내는 데 실패했지만, 다른 경우에서는 귀신을 쫓아낸 적이 있었다. 신중하게 실시된 금식과 진정한 마음으로 드리는 기도는 선을 행할 능력을 얻을 뿐만 아니라 신앙의 발전에도 도움이 된다. 이러한 원리의 개인적인 적용은 유익할 것이다. 신앙이 약해진 적이 있는가? 죄악에 빠져서 극복하려고 노력했지만, 실패한 적은 없는가? 그리스도께서 꾸짖었던 몸 안에 있는 악한 귀신과 같이, 여러분의 죄도 금식과 기도를 통해서 만이 쫓아낼 수 있는 그러한 유의 것일지도 모른다.

3. 신앙에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
많은 사람들은 주님께서 말씀하신 신앙으로 산을 이곳에서 저곳으로 옮길 수 있다는 진리의 말씀에 의문을 가져 왔다. 신앙이 그와 같은 일을 행하기 위해서는 거기에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 일치되는 목적이 있어야 한다. 이와 같은 기적이나 다른 기적들이 호기심의 만족이나 과시나 개인적인 이익이나 이기적인 만족을 얻기 위한 목적이라면,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리스도는 그와 같은 동기로써 기적을 일으키신 적은 없었다. 그는 단순히 표적을 구하는 자들에게 표적을 보여 주기를 완강하게 거절했다. 그처럼 산을 옮기는 것이 하나님께서 인정하신 것이라면, 신앙을 통해서 산을 옮길 수 있는 가능성을 부인하는 것은, 이 특별한 가능성에 관한 것과 원하는 목적에 타당한 신앙을 가진 자에게 “못할 것이 없으리라”는 일반적인 확신에 관한 것에 대해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부인하는 것이 된다. 그리스도 시대의 유대인들은 어려움을 극복하는 것을 산을 옮기는 것에 비유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좋을 것이다. 라잍풀이나 그외 다른 학자들에 의하면 아무리 복잡한 문제라도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하고 있고, 논증에 있어서 특별한 능력을 소유하고 있으며, 예리한 판단 능력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을 “산을 뽑을 수 있는”자라고 했다.

4. 성전 헌금.
본문에 나온 헌금은 유대인들이 성전에 바치는 헌금이지 로마 정부에서 징수하는 세금이 아니라는 것이 “디드라크마”의 설명에서 명백해졌다. 흠정역에서는 “이를” “헌금” 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이 은전은 “성소에 세겔대로” 계산하면 반 세겔에 해당되는 액수이었다. 이것은 “이십세 이상 된” 모든 남자가 해마다 바치는 정액세이다. 이것은 또한 “부자라고…더 내지 말고 가난한 자라고 덜 내지 말찌며” (출애굽기 30장 13 에서 15절) 라고 규정되어 있다. 정치적인 세력에 의해서 징수되는 세금은 디드라크마라 불리어지지 않는다. 더욱이나, 베드로에게 나아간 반 세겔 받는 자들이 정부 관리의 한 사람이었다면 아마 그는 주님이 반 세겔을 바치는지 아니하는지 묻지 않고 대신 세금을 요구했을 것이다. 후에 성전에 파괴되고 난 후, 유대인들이 받은 많은 모욕 중에는 그들의 성전 헌금을, 쥬피터 캐피토리너스라는 이교도 사원에 헌금으로 바치도록 선포한 로마인들에게 강제로 바치는 일이었다. 조세퍼스 (유대인 전쟁사, 7권, 6장 6절) 는 베스파시언 황제에 관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들이 어디에 있든지 또한 헌금을 바치게 했고 예루살렘 성전에 헌금을 바치듯 해마다 디드라크마를 카피톨 (옛 로마 쥬피터 신전) 에 바치게 했다.

5. 달란트와 데나리온.
주님은 임금에게 일만 달란트 빚진 자와 동료 종에게 일백 데나리온 빚진 두 사람을 대조 시킴으로써 커다란 불균형과 현저한 차이의 경우를 설명하려고 하셨다. 이 비유에 나와 있는 실제 액수는 그리 중요한 것은 아니다. 우리는 여기에 나온 달란트의 종류는 무엇인지 알 수 없다. 달란트의 종류에는 아티카 달란트와 히브리의 은 달란트와 금 달란트가 있었으며, 이것은 각각 그 가치가 달랐다. 옥스포드 성서 사전의 방주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한 달란트는 은 750온스에 해당된다. 5실링 부터는 온스로 불리우며 1온스는 187파운드 10실링에 해당된다.” 이 일만 달란트는 미화 925만 달라에 해당된다. 또한 이 책은 데나리온 (로마) 의 가치에 대해 설명해 주고 있는데, 1데나리온이 7펜스와 반 페니 즉 15센트이므로, 두번째 동료 종이 빚진 금액은 ‘미화’ 15달라에 해당된다. 이외에도 다른 기록에 나오는 달란트와 비교해 보아도 잘못된 것은 아닐 것이다. 트렌취는 이렇게 말했다.

“이 금액을 경전에 나오는 다른 금액과 비교해 보면, 이것이 얼마나 막대한 액수 인가를 생생하게 알게 될 것이다. 성소의 건축 비용으로 금 29달란트가 소요되었다." (출애굽기 38장 24절)

다윗은 성전을 위해서 금 3천 달란트를 예비했으며, 이스라엘 모든 지파 어른이 5천 달란트를 (역대상 29장 4 에서 7절) 드렸다. 또 스바여왕이 솔로몬 왕에게 120달란트 (열왕기상 10장 10절) 를 바쳤는데, 결국 이 나라는 극도로 곤궁에 빠지게 되었으며 요시야가 죽은 후에 애굽왕은 이들에게 금 한 달란트를 벌금으로 내게 했다. (역대하 39장 3절)

패러는 왕에게 빚지고 있는 종의 부채는 동료 종이 그에게 빚지고 있는 액수의 1,250,000배나 된다고 추산하고 있다.

6. 노예 제도의 인정.
어떤 독자는 악한 종의 비유에서 그들은 노예 제도의 인정을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 이야기에서 이 커다란 부채를 진 종은 그의 아내와 자녀와 그가 가진 모든 소유를 팔아 빚을 갚아야만 했다. 이 이야기 전체를 합리적으로 생각해 볼 때 기껏해야 특정한 왕의 명령에서 채무자와 그의 가족을 팔아야 한다는 기사를 발견할 수 있다. 그 당시 노예나 종이나 농노의 매매가 법적으로 인정되어 있었다.

비유의 목적은 전혀 노예 제도나 그 밖의 다른 사회 제도를 승인하거나 비난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모세의 율법에는 노예에 관한 사항이 명시되어 있다. 하갈에게 격려와 축복의 메시지를 전해 준 “여호와의 사자”는 그녀의 여주인의 권능을 존중했다. (창세기 16장 8절, 9절)

사도의 시대에도 정치적인 제도에 반대하지 않고 세속적인 법에 순종하여 합당한 생활을 하도록 지시하였다. (에베소서 6장 5절; 골로새서 3장 22절, 디모데전서 6장 1 에서 3절; 베드로전서 2장 18절)

기성 관습이나, 제도나, 법의 인정과 그것에 순종하는 것은 반드시 개인적으로 그 제도를 승인한다는 뜻은 아니다. 세상을 새롭게 할 그리스도의 복음은, 현존하는 정부에 대해서 혁명을 일으키거나 무정부 주의나 폭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개인의 의무를 가르치고 사랑의 정신을 퍼뜨림으로써, 널리 보급될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이 인간의 마음속에 심어 질 때, 인간은 그들의 이웃에 대하여 사심 없는 사랑을 갖게 되며, 사회 제도나 정부는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위해서 일하게 될 것이다.

인간이 그들의 마음을 활짝 열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일 때까지는, 부정과 압제와 노예 제도는 어떠한 형태로도 존재할 것이다. 개인의 이기심에서 우러나오는 사회 죄악을 근절 시키기 위한 시도는, 이기심이 커지고 만연 되는 한, 무익한 일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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